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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마을 전통 숲 ‘올미마을 심금솔숲’을 가보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마을 전통 숲의 변화를 알아보다

등록일 2021년11월06일 14시3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우리나라 전국에 현재 남아 있는 1,000여 곳의 마을 전통 숲이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 4곳은 춘천 올미마을 심금솔숲, 이천송말숲, 예천금당숲, 영양주실마을숲이라고 한다.

 

춘천시 신동 소재에 올미마을에 조성된 ‘심금솔숲’의 심금은 “심다”, 솔은 “소나무”라는 뜻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옻미마을 심금솔숲은 사람들이 소나무를 직접 심어서 만든 숲이라는 뜻이다.


 

200여 년 전 방풍림으로 새롭게 조성된 이 솔밭은 유일하게 누가 언제 심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엄황(嚴惶·1580∼1653년)이 지은 춘추지 '춘천읍지-누대정사 편'에 따르면 솔밭은 정덕 병자년(1516년) 선비 최도건(崔渡建)이 주도해 동서남북 10리에 수만 그루를 심어 조성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옻나무가 많아 옛 마을 이름이 옻미였다. 1500년대 나무가 심어질 당시 이곳은 칠산촌(漆山村)으로 불렸다. 옻나무와 관련이 깊은 지명으로 현재의 옻미(올미)마을로 불리게 된 이유다. 발음의 편의상 흔히 올미마을로 불린다.

 

마을 앞에 드리운 소나무 숲의 면적은 약 2㏊인데 숲의 폭은 좁게는 20m, 넓게는 40m에 이른다. 숲의 높이는 마을 바깥쪽으로는 낮고, 숲 가운데로 갈수록 높아져 마을 안쪽까지 유지되고 있다.

 

올미마을은 옻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 ‘칠산리(漆山里)’와 한글로 ‘옻미마을’이라고 하던 것이 발음의 편의를 위해 ‘올미마을’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마을 뒤 동쪽으로는 신동산(해발 150m) 자락이 병풍과 같이 둘러쳐 있고, 서쪽으로는 북한강과 맞닿는다. 북한 지역인 강원도 금강군의 옥발봉에서 발원해 화천군을 거쳐 흘러온 북한강은 올미마을 동쪽에서 흘러온 소양강과 몸을 섞어 신동 남쪽에서부터 의암호를 이룬다.

 

마을 서쪽과 남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이 들판은 북쪽으로 지내리에서 흘러온 한계천과 접하고 남쪽으로 우두저수지와 우두산(해발 133m)에 접하는데, 마을 남서쪽 들판을 주민들은 ‘우두벌’이라 부른다.

 

올미솔밭은 이 우두벌과 주거지 사이에 자리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띠숲을 이루고 있다. 올미마을 남쪽 신동산이 시작되는 부분의 고개를 ‘여우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소양강이 이어진다. 하지만 우두산과 여우고개에 막혀 마을에서는 소양강이 보이지 않는다.

 

올미마을에는 약 150여 가구, 200여 명의 주민들이 논농사와 시설하우스를 기반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농경지에 축사를 지어 소를 기르는 주민도 있다.

 

올미솔밭의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두 가지 전해진다. 하나는 풍수신앙에 따라 마을 서쪽의 허한 부분을 비보하기 위해 200여 년 전에 조성한 숲이라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우두벌 건너편 사농동에서 올미마을을 보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마을에서 마을이 훤히 바라다보이면 좋지 않다는 풍수신앙을 반영한 조성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는 이야기이다. 올미마을 주민들은 솔밭을 ‘심금솔밭’이라고도 하는데 인공적으로 심어서 조성한 솔밭이라는 뜻이다.

 

130여 년 전에 북한강 물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기 위해 기존의 숲을 벌목한 후 새로 조성했다고 한다. 마을 뒤쪽으로는 신동산이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동풍에 대한 걱정은 없었지만, 마을 서쪽 북한강과 남서쪽 의암호 방향으로는 마을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강한 바람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만다.

 

마을 주민들이 “옛날에는 소나무가 저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마을 어른들이 바람막이로 심어줘야 한다고 저걸 심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올미솔밭은 겨울철의 북서풍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솔숲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솔숲을 보호하기 위해 땔나무가 긴요했던 시절에도 숲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정해놓고, 벌채를 엄격하게 금지했다고 한다.

 

어르신들은 “과거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 가면 그 죄로 여기서 살지 못하게 내쫓아버리기도 하고, 마을에서 나무를 쓸 일이 있으면 솎아서 썼지. 초상이 나서 나무가 필요하면 동네꺼니까 일부 연약한것이나 그런 것을 솎아다 불을 때고, 학교 지을 때나 공동으로 쓸 일이 있을 때 솎아다 썼다”라고 한다

 

올미솔밭은 남북으로 700m 가량 길게 이어지면서 마을 앞을 가로막고 있다. 면적은 약 2ha이고, 폭은 20m에서 40m에 이른다. 숲 안에는 가슴높이지름 50cm 정도의 소나무 420여 그루가 바람을 견디며 서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 이 숲은 길이가 2km에 이르렀으며 폭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 입구인 여우고개 삼거리에서부터 솔숲이 무성했었다고 하며 솔숲이 울창했던 시절에는 겨울철 찬바람이 불어도 마을 안에 들어오면 포근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의 구술에 의하면 지금도 솔밭을 경계로 숲 안쪽은 바깥쪽보다 꽃 피는 시기가 1주일 정도 빠르다고 한다.

 

모진 풍상을 견뎌온 솔밭의 근현대사 올미솔밭은 길게 띠 모양으로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끊어진 부분이 있다. 한 데 어울려 있지 못하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소나무들도 있다. 그런 곳마다 어린 소나무를 새로 심어놓긴 했지만, 모진 풍상을 견뎌온 솔밭의 역사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가슴이 저며 온다.

 

솔밭의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제강점기에 송진 공출을 위해 껍질을 벗겨낸 아픈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래된 소나무들은 저마다 축구공만 한 크기로 살갗을 도려낸 흔적을 가슴 높이에 달고 세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해방 이후 주민들이 작은 옹기공장을 운영했던 적이 있었다. 옹기를 만드는 흙이 마을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생계를 잇기 위해 소나무를 벌채하여 도공들에게 팔았고, 공장에서는 그 나무를 화목으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올미솔밭 안에 군부대가 주둔했었는데,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소나무들이 베어지게 되었다. 현재 올미솔밭 안에 있는 ‘솔밭가든’ 자리에 군부대가 주둔했었다고 한다. 솔밭 너머 북한강변에 새로 신동초등학교를 지을 때도 소나무를 잘라 건축자재로 썼다고

한다.

 

2004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마을숲 장려상을 수상했으며, 이러한 명성 때문인지 여름철에는 숲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솔밭에 정자를 짓고 운동기구와 놀이시설 등을 설치하였는데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어 평소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솔밭 여기저기에 외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지은 주택과 식당이 들어서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외지인들이 점유한 곳은 사유지라서 숲을 훼손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나마 사유지를 제외한 솔밭은 마을 공동 소유로 되어 있고, 마을 공동체 조직인 ‘재송계’가 올미솔밭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더 이상 훼손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50여 년 전에 솔밭을 가꾸고 보호하기 위해 재송계를 조직했다고 하는데, 옛날부터 마을 공동으로 솔밭을 관리해온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재송계는 마을 통장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후계목을 식재하거나 풀베기 작업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공동 작업을 할 때는 한 가구에 한 사람씩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종합문예유성신문 편집국)
 
김춘태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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