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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춘향영정의 복위를 촉구한다.

등록일 2022년05월03일 16시56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사진 설명:1939년 2월에 남원 광한루에서 인촌 김성수와 백촌 강상호의 꽃길과 가시밭길, 시민 제공>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신진균께서 최근 우연히 최초 춘향 영정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남원지역의 여러 사정을 알게 되었다.  


 최초 영정이 다름 아닌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의 주선으로 그려졌다는 사실, 일제강점기 진주와  남원 사이에 있었던 연대와 협력의 사실은 오랫동안 형평운동을 공부해 온 나에게도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최초 춘향영정이 강상호 선생과 관련이 있다면, 진주의 형평 운동기념 사업회와 남원의 최초 춘향영정 복위시민연대라고 하는 단체 간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만남을 통해 춘향영정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남원지역의 현안을 전해 들을 수 있으며.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니라, 진주와 남원의 특별한 인연에 기대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진주와 남원, 두 지역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많았고, 400여 년 전, 2차 진주성전투 당시 수성장으로  활약하다가 산화한 황진 장군이 남원 사람이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도 남원 사람이었는데, 마산상고 입학 전 진주고등학교에 합격한 상태였다.

 

최근에는 일제 잔재청산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겪기도 하였다.
바로 친일작가 김은호의 그림을 시민의 힘으로 폐출시킨 일이다.

 

실존 인물이냐 아니냐는 논란을 떠나 진주와 남원은기생 논개와 춘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일까.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그린 사람이 김은호라는 친일작가였다. 2005년 진주시민들은 김은호가 그린 논개영정을 12년 만에 폐출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남원에서도 김은호의 춘향영정을 떼내기 위한 시민운동을 2005년부터 시작했으니, 진주의 경험이 좋은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남원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5년 뒤인 2020년에, 마침내 친일작가의 춘향영정을 철거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다른 영정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1931년 춘향사당 건립 당시에 봉안된 최초 춘향영정이었다.

 

이 우연한 발견은 놀랍게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사실을 끊임없이 엮어내 있다.  

 

김은호의 춘향영정 외에 또 다른 최초 춘향영정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 영정 제작에 형평운동의 아버지 강상호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것은 진주사람으로서, 형평운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였고. 나아가 최초 춘향영정을 강상호 선생의 동생 강신호 화백이 그렸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형평운동을 공부하고 있는 진주사람에게는 신박하게 다가왔지만, 최초 춘향영정이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고 이해하기 힘들고 현재 남원의 일부 시의원과 몇몇 단체의 반대로 최초 영정이 봉안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납득하기힘들지만, ‘춘향이 답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한다는 소릴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춘향이는 젊고 예쁜 처녀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시대착오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역사적 단계마다 발휘해 온 남원정신의 단절 내지 실종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남원은 특별한 곳이고 앞에서 언급했던 사실 외에도 남원고을은 정유재란 당시 만인의총으로 대표되는 호국의 땅이었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김개남 부대로 대표되는 혁명의 땅이었다.

 

 이러한 남원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다. 이두용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남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고 특히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1931년, 남원 사람들은 춘향이를 통해 또 한번 남원정신을 일깨웠고 말살되어 가던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춘향사당을 짓고 대한민국 최초 축제인 춘향제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축제를 기획한 사람은 남원예기 최봉선과 같은 기생들이었고 이현순, 정광옥 등 남원지역 독립단체 회원들도 함께 했다.


 춘향사당을 짓기 위해 이들은 순회공연을 하며 기금을 모았고, 진주 기생들도 힘을 보탰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춘향제를 기획한 사람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 당시 기획자들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춘향영정을 그려서 봉안하고 제향을 지낸 뒤, 판소리대회를  열며 우리 얼과 문화를 지켜내고자 하였다.


 최초 영정은 춘향전 원본에 근거해서 어사부인으로서의 품위와 위엄을 갖춘 30대의 춘향을 그렸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 초상화(영정)는 그 인물의 생김새를 그대로 그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의 성품이나 사상,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따라서 우리가 영정을 바라볼 때, 그것의 예술성보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춘향의 상징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춘향은 누가 뭐래도 정열의 화신이요 열녀춘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숭배하는 춘향은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후의 춘향이지 맺기 전의 처녀 춘향이 아니다.

 

일찍이 창해(滄海) 최익한 선생은 1939년 동아일보 칼럼을 통해 예쁘고 젊은 “처녀 춘향은 남성염선(艷羨)의 미적 대상은 될지언정 미와 선을 겸비한 정열실천자인 열녀춘향이 아닌 이상에는 일개 미인처녀에게 머리를 숙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설파했다.


 30대 어사부인의 모습을 그린 것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이룬 평등사상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최초 춘향영정의 옷을 태극색깔로 배치하여 조국독립과 광복의 염원을 담아냈고 더군다나 형평운동의 선도자 강상호 선생이 주선함으로써 형평정신과 맞닿아 있고, 남원기생들의 춘향사당 건립에 진주기생들도 힘을 보탰던 지역연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최초 춘향영정은 남원정신의 발로이자 민족정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 춘향영정 복위를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구실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아직도 기생, 백정 등의 최하층 천민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양반(신분)의식 때문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에라도 남원시민의 이름으로 고유제를 지내고 최초 춘향영정을 춘향사당에 봉안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춘향영정을 다시 봉안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므로, 최초 춘향영정의 복위는 꺼져가던 남원정신을 되살려내는 것이요, 남원과 진주 지역 간의 연대와 협력의 역사를 이어가는 가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일이다.


 남원정신의 부활 소식을 하루속히 전해 듣기를 기대해본다.

           

               [종합문예 유성신문 편집국]

 

 

 


 

정용완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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