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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종합문예유성 글로벌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소논문

(사)종합문예유성 글로벌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소논문

등록일 2021년06월29일 14시56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사)종합문예유성 글로벌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소논문


(사)종합문예유성 글로벌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는 대학원 교육과정의 필수 요소인 소논문 작성 과제가 있다.
이번 2021년 6월 20일 졸업한 글로벌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제2기 졸업생도 졸업 소논문을 제출했다.

모든 학문은 논문 형식으로 정리되어 기록되기 때문에 문예대학원 소논문 작성은 주제를 깊이 탐구하여 논문을 정리해나가면서 학문적인 소통을 하고 논리적 사고를 구조화하여 표현력과 설득력을 기르는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 분 한 분 소논문을 게재해 본다.

 


(사)종합문예유성 글로벌문예 대학원

제2기 문예창작학과 (김현숙 시인)

 


    [김현숙 시인]

 


[소논문(小論文)]

 

이육사(李陸史)의 생애와 작품 세계관의 고찰

김현숙
글로벌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차례
서론 / 2
본론 / 2
결론 / 4
참고문헌 / 5

 

Ⅰ. 서론(序論)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靑葡萄)》《꽃》《광야(曠野)》《교목(喬木)》《절정(絶頂)》《황혼(黃昏)》에 대한 시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시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는, 동기부여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시 마다 가슴을 울리는 그의 문학작품은 가슴속 깊이 묻혀 있었던 나라를 향한 충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육사 생애(生涯) 작품(作品)은 조국(祖國)에 대한 현실(現實)의 극한 상황(狀況)을 극복하는 의지(意志)가 담긴 시, 연의 행마다 뜨거운 심장(心腸)에서 흘러나오는 용기(勇氣)와 포부가 살아 숨 쉬는 시인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초극화(超克化)한 의지(意志)와 강한 결단(決斷)의 시인이었고 또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독립투사였다.
이러한 이육사 시인의 문학 입장을 새기며 재조명을 해보려 한다.


Ⅱ. 본론(本論)
이육사는 경북 안동(安東)에서 1904년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출생《1904. 4. 4 ~ 1944. 1. 16》 사망, 본관, 진성(眞城)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출생지 경북 안동(安東), 조부 이중직(李中稙), 조모 오종(吳鍾), 외조부 허형(許衡), 외조모 이중(李中), 부 이가호(李家鎬), 모 허길(許吉), 육(六)형제, 형 원기(源祺), 이원록(李源祿), 셋째 원일(源逸),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 육(六)형제 중 차남 아들로 태어났다.
육사의 조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 학교를 운영하였고 조부에게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12살 이후(1905) 백학서원(白鶴書院)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고 귀국해 20살 무렵까지(1923)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주로 한학과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24년 안일양과 결혼,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장투쟁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 6.10만세 사건 후 1926년 베이징 북경으로 가서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다음 해 1927년 귀국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張鎭弘) 독립운동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 의거의 배후(背後)로 지목돼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대구지점 폭파(爆破)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형님과 동생이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2년 4개월』간 옥고 고문 후유증(後遺症)으로 병을 얻은 이육사, 그럼에도 독립투쟁(獨立鬪爭)을 멈출 수 없었다. 장진홍(張鎭弘) 의사가 잡히면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또 예비 검속되기도 했다. 출옥(出獄) 후 1931년 다시 북경으로 건너간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들어가서 2년 뒤에 조선 군관학교(軍官學校) 제1기생 졸업(卒業)하고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2년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김원봉이 이끄는 비밀업무(秘密業務)를 수행하던 이육사는 1934년 일제 경찰(警察)에 체포되었다. 대구 경찰서에서 7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른다. 독립투쟁으로 총 17번의 옥살이로 늘 병약(病弱)하여 자주 요양소와 병원, 이사를 다니며 틈틈이 작품(作品)을 발표(發表)하였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歸國), 그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押送), 1944년 1월에 피검되어 1월 16일 41세의 나이로 북경 감옥소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강점기에서 解放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의 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항일(抗日) 투쟁(鬪爭)에 대한 내용(內用)을 담고 있지만, 이를 직설적(直說的)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언어적(言語的)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象徵)과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정신적 의지를 드러낸다. 또한, 베이징 유학 시절에 받은 중국 문학의 영향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태도도 나타난다. 이러한 부분이 기존의 저항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적인 면모와 다른 부분이며,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태도(態度)로 일관한다는 비판(批判)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民族)의 양심(良心)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雄渾)한 필치(筆致)로 민족(民族)의 意志(의지)를 노래했다.


Ⅲ. 결론(結論) 

주목(注目)받았던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초극화된 현실 앞에서 결국 이 시인은 절제, 지조, 의지가 높은 소나무 같은 교목이라고 하고 싶다. 혹독한 일제강점기에서 온갖 시련(試鍊)을 겪으면서도 굴복(屈伏)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살아온 육사의 삶의 칼날에 서서 강철로 된 신념을 통해 형상화한 육사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는 굳은 의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지게 한 원동력은 애국심이 강한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굴복하지 않는 강한 행동의 실천하는 자, 진정한 독립투사였다. 과거(過去)와 현재(現在) 미래(未來)까지 바라보는 민족(民族)의 독립투사 애국심(愛國心)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참고문헌

1. 마음의 시 / 2017년 2월 20일/ 문지사
2. https://youtu.be/cMQB0ao3z98
3. https://youtu.be/WXtw8-SA7YY
4. https://youtu.be/Zn88VktYW4c 
5. https://youtu.be/vDYUPs7K3mM
6. https://youtu.be/q0bcr-zWE50
7. https://youtu.be/NELYvEwbJIU
8. https://youtu.be/l5AvHXqa26k

 

   [종합문예유성신문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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