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사 괘불 남원 수륙재’
-국운융창과 남원발전 염원, 남원 만인의사 수륙재로 열려
⛰선원사 괘불 남원 수륙제/남원 선원사 제공
(제너럴 타임즈 정용완 기자) 남원 선원사에서는 오는 11월 9일(토요일) 선원사 괘불을 이운하여 만인의사 호국 수륙재를 봉행한다. 이 수륙재는 종래로 전래되었던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순국 선열들의 재향이 일제에 의해 끊긴지 100여년만에 재현되는 행사다.
선원사는 신라 도선국사에 의해 남원의 비보사찰로 세워진 이래 특히 정유재란 남원성전투의 만인의사의 영령을 달래기위해 괘불탱화를 조성하여 수륙재를 지내오다 일제 강점기에는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이 일제에 의해 폐지되자 기우재 등으로 지역의 번영을 위해 기도한 호국사찰이다.
남원지역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잇는 의미에서 지역의 모든 사찰 참여하여 전통의 예법에 따라 선원사 괘불을 모시고 수륙재를 봉행한다. 이 행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다.
전북 남원시의 선원사에서는 오는 11월 9일(토요일) 국운융창과 남원발전을 염원하고, 남원 만인의사의 영혼을 천도하는 ‘선원사 괘불재’를 개최한다.
서기 875년 신라 헌강왕 원년,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국사에 의해, 남원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비보사찰로 창건되었다는 유래를 지닌 선원사는 남원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심사찰로, 오랫동안 남원지역민들의 각별한 관심과 후원을 받으며, 남원지역의 신행중심공간 역할을 하여 온 것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1597년 8월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로 불타버린 선원사는 1695년 당시 남원현감 김세평에 의해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대형 괘불탱 역시 조성된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원사의 괘불은 전란으로 유명을 달리한 고혼을 위한 천도재, 가뭄이 극심할 때의 기우제 등을 지낼 때, 좁은 사찰 경내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요천 변에 괘불을 옮긴 후 의례를 지내왔다는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렇듯 선원사 괘불은 남원지역에서 행해지는 큰 의례가 있을 때 자주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발견된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인 1929년 3월 28일자 부산일보 일본어판 기사에서는 큰 가뭄 때문에 선원사의 대형 불화를 걸고 기우제를 지내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 제일 남원의 대불화(朝鮮 第一の 南原の 大佛畵)’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때 모셔진 선원사의 괘불은 석가모니가 그려진 불화로, 폭 5칸(약 9m), 길이 11칸(약 20m)에 이르는 조선에서 제일 큰 불화로 추정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지금의 아파트 높이로 약 7~8층에 이르는 실로 거대한 괘불로, 기사 제목대로 선원사 괘불이 나라 안에서도 손꼽히는 대형불화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원사 괘불재의 전통은 10년 후인 1939년 7월, 조선신문 일본어판 기사에 ‘남원의 기우제’라는 기사로 보도되며 예전부터 전해오는 관례대로 관내 모든 사찰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기우제를 지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에 모셔졌던 이 대형 괘불은 훼손이 심해져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내용은 1921년 3월 수룡 채기선 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이 괘불함이 손상이 심하여 고쳐 만들었다는 사실을 묵서에 남기고 있는 것에서 추정할 수 있다. 견고한 나무로 제작된 보관함도 손상될 지경이었으니, 닥나무종이를 겹쳐 만든 괘불 또한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선원사( 아이타불 쾌불탱)
현재 선원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괘불은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 하고, 좌우 협시보살을 중심으로 상단에 제석천, 범천상 등 여러 권속들이 그려진 아미타불괘불이다. 이 괘불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화기에는 일제강점기 후반부인 1942년 5월에 남원군수와 지역민, 그리고 인근 사찰의 시주로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괘불은 조선시대에 제작되어 일제강점기 때까지 모셔졌던 예전의 괘불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높이 약 9m, 넓이 약 6m에 이르는 역시 대형 괘불이다. 현재의 선원사 괘불은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마쳤으며, 근대문화재로의 등록을 진행 중에 있다.
작년 초 선원사 주지로 부임한 운문스님은 선원사의 오래된 역사를 찾고, 이러한 전통을 지역불교문화로 승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데,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산사문화예술제 공모에, 지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전승되어 온 사실이 뚜렷이 남아있는 ‘선원사 괘불재’ 콘텐츠로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봉행되는 이번 ‘선원사 괘불재’는 국운융창과 남원발전을 염원하고, 오랫동안 남원지역의 큰 아픔으로 남아있는 정유재란 남원성전투에 희생된 만인의사 수륙재로 진행되는데, 종단을 초월하여 남원사암연합회의 후원 하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산스님들이 대거 참여할 예정에 있어, 지금까지 지역에서 보기 힘들었던 불교의례와 불교음악 등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원사 및 선원사 괘불 연혁보고
선원사는 서기 875년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유서 깊은 내력이 전해지는 사찰입니다.
신라하대에 활동했던 고승으로 풍수지리에 통달했던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주산인 백공산의 지세가 약하기 때문에, 교룡산의 기를 누르고 백공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지금의 위치에 선원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선원사의 힘을 더욱 북돋우기 위해 철불을 모셨고, 철불의 힘을 더욱 왕성하게 하기 위해 특별히 순금으로 도금하였다’라는 기록이 1982년도 남원군에서 발간한 ‘고도 남원의 얼’에도 실려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선원사는 남원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남원의 비보사찰’로 세워진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고려시대 선원사에 대한 기록은 잘 발견되지 않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아들 이종학이 쓴 선원사 시에 의하면, 당시에도 선원사에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고, 또 남원 지역의 몇몇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선원사는 고려시대에도 남원부의 중심 사찰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는 정유재란으로 남원성이 함락될 때 선원사 역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게 됩니다. 조선후기에 편찬되어 남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용성지에는 ‘선원사는 병화를 입은 뒤 폐하여 하나도 일으키지 못하였으며, 다만 금불이 있었을 뿐이었고, 부사 김세평이 을해년간에 중창하여 승려를 머물게 하고 규약을 만들어 지키면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갑술년인 1694년에 부임한 김세평 부사가 이듬해인 을해년 1695년에 중창하였으며, 남원부의 도움으로 스님들이 머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남원부와 선원사의 긴밀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선원사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유재란 이후 선원사의 중창불사 시기가 을해년 1695년보다 1갑자, 즉 60년 후인 1755년 을해년에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남원시 홈페이지나 모든 백과사전 등에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니 1695년 중창으로 수정되어야 하겠다.
1971년에 건립된 ‘남원기로회 불공계사적비’에 의하면 남원부에는 정유재란 이후 ‘남원노계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고, 그 회원 중에서 불공계를 조직하여 선원사의 유지 및 지원을 해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용성지에 나오는 ‘규약을 만들어 지키면서 승려들을 살게 하였다’라는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선원사의 운영유지를 위한 위답 조성 등의 불사에 남원의 유력단체인 ‘남원기로소의 불공계’가 큰 도움을 준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렇듯 선원사는 남원지역의 주요 신행공간이었고, 남원지역민들의 보호와 지원, 그리고 사랑 속에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원 선원사는 대형 괘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1982년 발간 ‘고도 남원의 얼’ 책에 의하면, “불교 대제大祭, 즉 선원사에서 행하는 큰 의례가 있을 때면, 모여드는 신도와 수만 명 군중이 좁은 사찰 경내에 모일 수 없으므로, 불단을 임시로 야외 백사장에 가설하여 행사를 치르는데, 그때마다 무거운 불상을 운반해 갈 수 없어 큰 포장에 부처 그림을 그린 괘불을 가설하였다”라는 ‘괘불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원사의 괘불은 김세평 부사가 약사전을 재건하면서 새로이 제작한 것인데, 그 크기는 높이가 40척(약12m), 폭 25척(약 7.5m)이나 되며, 가뭄이 계속되어 기우제를 올리는 향토 행사에도 선원사 괘불을 야외로 가설하여 제례와 기도를 올리니, 이 풍속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남원 선원사의 괘불은 수만 명의 군중이 참여한 요천 변에서의 대중법회, 또한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남원대교 부근 요천 변에서 행해졌던 ‘괘불기우제’ 등에 모셔지고 불단을 이루며, 지역민들의 안녕과 남원의 번영, 그리고 전란과 기근 등으로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행사인 재齋를 지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원사 역사와 마찬가지로 백과사전 등에 소개되고 있는 ‘선원사 소장 괘불이 1755년 김세평 부사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는 내용 역시, 1695년 조성으로 수정되어야 하겠다.
조선후기 선원사 괘불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나, 남원성전투로 순절한 만인의사에 대한 천도재, 가뭄이 심할 경우에 거행되는 기우제 등 남원 지역민들을이 대거 참여하는 의식행사에 주로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일제강점기 때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에 ‘선원사 기우제’라는 내용으로 보도된 기사로 발견되어 흥미롭습니다. 1929년 3월 28일자 부산일보 일본어판 기사에서는 큰 가뭄 때문에 선원사의 대형 불화를 걸고 기우제를 지내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 제일 남원의 대불화(朝鮮 第一の 南原の 大佛畵)’라는 기사 제목에 ‘한발(旱魃)에 비 내리기를 빌다’라는 소제목으로 나오는 이 내용에는 당시 모셔진 선원사의 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려진 불화로, 폭 5칸(약 9m), 길이 11칸(약 20m)에 이르는 조선에서 제일 큰 불화로 추정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아파트 높이로 약 7~8층에 이르는 실로 거대한 괘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기록으로 전해지는 길이 12m, 폭 7.5m와는 괘불의 크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선원사 괘불이 나라 안에서도 손꼽히는 대형불화였음을 알 수 있겠다.
이 괘불재는 나무로 괘불을 걸고, 많은 스님들이 목욕재계를 한 후 57일, 즉 35일간 봉행되었는데, 이때 원근에서 이를 보기 위해 온 수 만명(幾萬)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노점상이 열리는 등 선원사 인근이 성시를 이루는 풍경을 신문기사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사 말미에 괘불재를 마친 결과, 불가사의하게도 큰비가 세차게 내렸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豪雨沛然)
이러한 선원사 괘불기우제의 전통은 10년 후인 1939년 7월 12일, 조선신문 일본어판 기사에 ‘남원의 기우제’라는 기사로 보도되며 예전부터 전해오는 관례대로 관내 모든 사찰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기우제를 지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도 모셔진 괘불에는 석가여래부처가 그려져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괘불은 훼손이 심해 더 이상 대중 속으로 모시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괘불을 보관하는 괘불함에서 발견된 기록에서 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21년 3월 수룡 채기선 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이 괘불함이 손상이 심하여 고쳐 만들었다는 사실을 묵서에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짐작컨대 기우제를 포함한 많은 의례에 선원사 괘불이 모셔지다보니 견고한 나무로 제작된 보관함도 손상될 지경이었으니, 닥나무종이를 겹쳐 만든 괘불 또한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오늘 선원사 괘불재 봉행에 모셔지는 괘불은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 하고, 좌우 협시보살을 중심으로 상단에 제석천, 범천상 등 여러 권속들이 그려진 아미타불괘불입니다. 이 괘불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화기를 살펴본 결과, 현재 소장 중인 괘불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5월에 남원군수와 지역민, 그리고 인근 사찰의 시주로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괘불은 조선시대에 제작되어 일제강점기 때까지 모셔졌던 예전의 괘불보다 크기가 작기는 합니다만, 높이 약 9m, 넓이 약 6m에 이르는 역시 대형 괘불입니다. 현재의 선원사 괘불은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마쳤으며, 근대문화재로의 등록을 진행 중에 있다.
이상과 같이 선원사는 남원 지역민들의 보호와 적극적인 지원 하에 유지되어 왔었고, 선원사 괘불은 지역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대중들과 함께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사롭지 않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선원사에서 괘불을 모시고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괘불재를 봉행하게 된 것은, 지역의 역사 복원과 무형문화유산의 발굴과 재현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남원 지역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선원사의 전통과 역사가 다시 한번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길 기원하며, 선원사 역시 지역사회와 대중들과 늘 소통하며 부처님의 불법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찰이 되길 바란다.
[제너럴 타임즈 편집국]